썰물로 드러난 회갈색의 바지락 양식장에 앉아 있던 검은댕기두루미 한 마리가 그녀의 집이 있는 쪽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홀로 살고 있는 늙은 두루미였다. 그 두루미는 언제부터인가 그녀의 집이 자리잡고 있는 언덕 뒤쪽 기슭의 늙은 소나뭇가지에 앉아 있곤 했다.
“나 이리로 죽으러 왔다.” 이 말을 그녀가 혼자 사는 두루미에게 배웠다. 그녀로서는 환장하게 향기로운 말이었다. 오래오래 묵은 술처럼. 그녀는 혼자서만 가지기 안타까운 값진 물건을 뭉청뭉청 싸 보내고 싶어지는 친지들에게 문득 그 말을 하곤 했다. 그렇지만, 마흔 다섯 살이라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청바지에 청점퍼 차림을 한 남동생 창기에게 이 말을 해놓고 그녀는 후회했다. 그냥 바람쐬러 나섰다는 그에게서 여러 번 포개 접어 숨긴 암수표 같은 음모의 부피와 그림자가 감지되었다.
그녀가 대학 시험에 떨어지고 나서 서울에 올라갔을 때, 탕수육에다 고량주를 마시고 난 그 여자가 둔갑한 여우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리고 눈을 거슴츠레하게 뜬 채,
“나도 그 여우같이 살고 있다. 내 눈, 귀, 코, 입, 내 백합꽃 같은 속살에다가 상처 내주고 그 종이 훔쳐 갖고 달아난 세상한테 복수를 하고 그것을 찾으라고……”
하고 말했다. 그 여자와 고량주를 함께 마신 김군의 얼굴은 창백해져 있었다. 눈 주위와 양쪽 볼이 연지를 칠해놓은 듯 불그레할 뿐.
“그 종이만 찾으면은 다시 예전의 착한 암여우로 둔갑해서 산골짜기로 들판으로 마을로 줄달음질쳐 다니고, 닭장 속으로 들어가 포동포동한 처녀닭 총각닭 잡아먹으면서 속 편히 살 터인데……그렇게 잘 먹어 가지고 기가 팔팔해지면은 진짜 양귀비 같은 미녀로 둔갑해서 내노라 하면서 떵떵거리고 으스대는 놈들 유혹해서 은행돈 뭉텅이째 빼내다가 쓰기도 하고…… 야아, 얼마나 얼마나 좋겄냐? 안 그러냐? 김군아?”
“그 여자는 오늘 밤 알몸이 되어 너를 유혹하려고 일부러 내기에 져준 거야. 그 여자는 황음병에 걸려있어. 그 황음병 때문에 가까이 한 남자들을 다 잡아 먹었어. 우리 아버지두 그래서 죽었단 말이야. 너도 조심해. 걸려들면 죽어. 그 여자 별명이 무언 줄 알아? 불여우야 불여우. 그 여자 그것은 문어 빨판 같다고 소문이 났어. 그 소문 때문에 광주에서 못살고 이리로 온 것이야.”
저자소개
한승원(저자): 1968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목선'이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앞산도 첩첩하고' '안개바다' '미망하는 새' '새터말 사람들', 장편소설 '그 바다 끓어 넘치며' '불의 딸' '아제아제 바라아제' '해일' '까마' '해산가는 길' '포구' 등과 산문집 '스님의 맨발'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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