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나는 내 불안한 욕망과 타자의 명령 사이, 요컨대 그 중간에 있는 하나의 미끄럼틀 위에 서 있다네. 그리고 이것도 알고 있지.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가면 푸른 카펫이 있는 바닥에 떨어진다는 것을.'
그게 무슨 말인가 싶었지만 나는 되묻지 않았다.
'요즘 나는 내가 그동안 알고 지냈던 사람들을 만나고 다닌다네. 왠 줄 아나? 말하자면 미끄럼틀 위에 서 있는 시간을 연장하고 다니는 셈이지. 그래, 내가 자네를 만나고 있는 순간도 그 연장의 시간인 셈이야.'
'갑자기 모든 게 제멋대로라는 생각이 드는 거야. 시간이 쭈글거리기 시작하고 원치 않는데도 다른 세계가 내게 개입하려 하고 있단 말이야. 자기 죽음을 연장하기 위하여 돌연 먼 친구가 찾아오기도 하고 말이지.'
'구체적으로 얘기해 봐요.'
'가령 지금 운행되고 있는 세계와 나 사이에 틈이 벌어져 있다는 거지. 누가 내 발목을 잡고 있거나 혹은 뒤에서 등을 마구 떠밀고 있다는 거지. 이를테면 타자의 속도라는 게 내게 개입해 있어.'
'……정명 씨, 차종에 따라서는 최고 시속이 백 킬로도 있고 이백 킬로도 있고 삼백 킬로도 되는 게 있어요. 하지만 그게 다 알맞은 속도라는 건 아닌 거예요. 어떤 때는 아차 하는 순간에 도난차량을 타게 되는 경우도 있는 법예요. 알았죠?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그때마다 제 속도를 유지할 줄 알아야 한다는 거예요.'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벌써 궤도를 이탈한 상태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태라면 말이지. 세희, 우리가 보고 느끼는 대로 세상은 정말 단면이거나 평면이 아닐지도 몰라. 전혀 다른 세계가 가까이에서 끊임없이 우리를 위협하고 또 유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거야.'
저자소개
윤대녕(저자): 1962년 충남 예산 출생. 1990년<문학사상> 신인상으로 등단. 94년 제2회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수상. 96년 중편 <천지간>으로 제20회 이상문학상 수상. 98년 단편 <빛의 걸음걸이>로 제43회 현대문학상 수상.
주요 저서로 창작집 <은어낚시통신> <남쪽 계단을 보라>, 장편 <옛날 영화를 보러갔다> <추억의 아주 먼 곳>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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